7월 키씽에이즈살롱은 게이 커뮤니티 내 감염인 혐오에 대해 다뤘다. 친구사이 이종걸 사무국장이 진행을 맡았고 상훈과 맹보가 패널로 참석해 PL로서의 자기 경험을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오갔던 논의와 질문에 덧붙이고 싶은 생각을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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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인 HIV는 대표적인 혐기성 바이러스로 공기에 노출되면 죽는다. 열에도 약하여 약 71℃의 열을 가하는 것만으로 완전히 사멸하고 체액이 건조되어도 사멸한다. 염소계 소독제에는 특히 약해 수돗물 정도의 염소 농도에서도 바로 비활성화되어 감염력을 상실한다. 곤충매개성 바이러스가 아니기 때문에 모기를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1회 성관계로 HIV에 감염될 확률은 0.1~1% 정도로 낮으며 HIV 감염인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 감염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성관계로도 감염된 사례가 있으므로 성관계 시에는 콘돔 사용을 습관화하는 것이 좋다. 올해는 에이즈 치료제 트루바다가 국내에서 예방 목적의 적응증 허가도 받아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 복용할 수 있다. 이제는 콘돔 없이도 HIV를 예방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사전예방조치인 프렙과 사후예방조치인 펩에 대해서는 작년 살롱 후기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고 있다.

‘HIV 감염인’이란 넓은 뜻으로 보면 에이즈 환자를 포함해 HIV에 감염된 모든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질병의 진행경과를 적용하면 HIV에 감염되었지만 면역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되고 에이즈 정의질환이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에이즈 환자’란 HIV에 감염된 사람 중 면역체계가 손상된 사람과, 면역이 저하되어 비감염인에게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세균·바이러스·진균·기생충 등에 의한 감염증·암 등의 질병들이 나타나는 사람을 말한다(질병관리본부, 2012).

HIV 감염인과 에이즈 환자를 통틀어 PL, People Lving with HIV/AIDS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이 사안을 바라보는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인격이 있는 누군가의 건강 상태를 의학적으로 나열하고 그 질병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그 사람이 지니는 다양한 면을 들어내고 단지 질병으로만 그를 바라보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병과 바이러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통에는 얼굴이 있다.

PL이라는 단어는 AIDS(후천성면역결핍증)가 갖고 있는 도덕적, 사회적 낙인이 인간으로서 감염인이 지니는 다양한 면을 소거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만을 단순화해 강조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 단어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질병의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누군가는 이것과 함께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렇게 HIV/AIDS를 바라보려는 믿음은 설령 내가 이 병에 대한 의학적인 사실을 잘 모른다 할지라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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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첫 내국인 환자가 발견된 것은 1987년의 일로, 그 후 30여 년간 의료 기술은 발전해 이제는 그 효과가 입증된 에이즈 예방약까지 등장해 HIV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에이즈를 비규범적 성행위를 하는 이들의 질병 정도로 치부하거나, 나의 일은 아닐 것이라는 낙관적인 편견이 가져오는 대중의 무관심 속에 에이즈 인식 개선이나 정책적인 접근은 유의미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질병관리본부와 대한에이즈학회가 공동 발표한 ‘에이즈 행태 조사 보고서’(2015)에 따르면 에이즈에 대해 사람들은 ‘죽음’ ‘불치병’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의학이 발달해 하루 한 알 치료제를 복용하면 비감염인과 다를 바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만성질환이 되었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에이즈는 걸리면 죽는 병,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초기 에이즈 패닉이 있었던 80년대에 정부가 사용했던 공포소구 전략의 한계와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질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조해 경각심을 높여 예방 효과를 얻으려 했던 과거의 캠페인과 미디어 속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아직도 해당 질병과 감염인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희귀 질환으로 분류될 만큼 감염인 수가 적은 한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감염인을 직접 마주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경험보다는 감염인을 문제 삼는 선정적인 기사의 인터넷 댓글이나 기독교 단체가 주류 이성애 질서에서 벗어난 소수자 집단을 낙인찍고 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구실로서 이용한 질병의 이미지를 통해 에이즈를 접한 경험이 대부분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보고서의 결과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대중들의 에이즈 지식에 대한 정답률은 겨우 15%에 그쳤지만 응답자의 92.8%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편견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나의 일이 아니라는 무관심에서 비롯된 이러한 낙관적인 편견은 HIV/AIDS 이슈를 공중보건의 위협이 되는 에이즈 괴담 내지는 일부 종교단체의 혐오와 선동의 언어에 불려나오는 희생양으로만 바라보게 할 뿐이다. 성행동의 문제인 HIV 감염을 이성애/동성애라는 성정체성의 문제로 환원하는 이러한 선동은 정작 사람들을 HIV 감염에 더 취약하게 한다. HIV는 동성애, 혹은 항문 성교를 한다고 하여 자연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HIV는 정체성과 성교 형태를 막론하고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사람과 혈액 내지 체액이 오가는 성접촉을 한다면 감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동안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의학 기술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자신의 감염 사실을 알고 치료제를 복용하여 체내의 바이러스 수치를 낮추어 미검출 상태가 된 감염인은 타인에게 전파 능력이 없다는 것이 최신 연구결과를 통해 증명되었다(U=U). 따라서 감염인을 발견하고 조기치료를 시작해 에이즈로의 진행을 막아 감염인이 전파 능력을 상실하면 더 이상 신규 감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파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HIV 예방 정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나 자신이 HIV에 걸릴 수 있음을 인지하고, 정기적인 검사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알게 하여 확진 판정을 받으면 즉시 치료에 들어가 건강한 면역력을 유지하고 타인에 대한 전파력을 0으로 만들어 결과적으로는 HIV/AIDS를 종식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HIV 감염인에 대한 비과학적인 혐오와 차별은 내적 낙인을 강화해 의료적인 처치를 받으면 되는 질병의 문제를 도덕적 가치판단이 섞인 문제로 바라보게 하여 그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또한 감염인의 인권보호보다는 공중보건을 우선시하여 감염인의 인권을 적극적으로 침해했던 초기 에이즈 예방정책의 영향이 아직도 사회 전반에 남아 확진 판정을 받은 감염인들에 대해 불필요한 차별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감염인의 치료 지속성과 순응도를 떨어뜨려 결과적으로는 공중보건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HIV/AIDS에 대한 국제사회의 연구결과와 의료진, 사회운동가들의 노력으로 선진국에서의 인식은 많이 개선되었으나 그 최신의 연구결과와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삶에서의 간극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어 대국민적인 차원의 메시지 전달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혐오와 차별의 언어는 우리와 함께 지금 이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감염인들의 얼굴을 지우고 그들을 공중보건에 대한 위협이나 ‘비용’ 정도로 표현하는 악질적인 선동을 계속하고 있다. 단순히 의료적인 치료를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닌, 사회 전반에 깔린 구조적인 차별과 억압 속에서 해당 집단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책을 요구하고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어떻게 이들과 우리가 함께 건강히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감염인 개인을 병리화, 범죄화함으로써 사회 정책 면에서 효과적인 예방과 조치를 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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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M(남성과 성행위하는 남성)은 대표적인 고위험군 집단으로 분류된다. 자칫 오해를 낳을 수 있는 고위험군이라는 말은 이들이 사회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 기존 주류질서에 맞게 설계된 사회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어서 이들이 위험에 노출되는 구조적인 취약성을 갖는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HIV 감염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해당 집단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이유가 아니라 이에 걸맞은 접근법과 정책을 세워야 할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해당 집단을 낙인찍고 주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의 특성에 맞는 의료 조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위험군 집단에게 콘돔과 젤을 보급하는 것에서 나아가 국제적으로 검증된 효과적인 조치인 사전예방약을 고위험군의 예방책으로 도입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찌하여 치료제와 예방약이 개발되었고 그 효과가 입증되었는데도 그 접근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가? 혐오를 선동하는 일부 종교 집단의 목소리 때문에? ‘에이즈 환자에 천문학적인 세금을 들여 나라가 망한다’는 말에 예방과 치료를 포기할 것인가? 메르스가 유행하면 세금을 투입해 방역 조치를 한다. 세금을 아끼려고 방역 조치를 하지 않을 것인가? 세금은 그렇다면 어디에 쓰여야 하는 것인가? 혐오하는 것은 쉽다. 아픈 사람을 세금이라는 비용으로 공격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그 혐오는 사회를 더욱 아프게 할 뿐이다. 그들이 적절한 조치를 받아 사회에 복귀하도록 도울 책임이 국가에게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나 최근 보고되는 젊은 층의 신규 감염인 증가는 더욱더 이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포용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활발히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인구가 직장에서의 부당한 조치로 일자리를 잃고 경력 단절의 상황에 처하는 것은 혐오선동세력이 들고 나오는 세금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일부 혐오세력의 선동에 기대 국가가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신규 감염인이 늘어가는 이 사태를 해결할 정부의 의지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행위로는 그 어떤 공중보건상의 긍정적인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는 경험으로 배웠고 이를 뒷받침하는 착실한 연구와 주장을 축적해왔다. 감염인에 대한 정책은 국제사회의 수준에 맞추어 정부의 입장을 확고히 하고 당사자 집단의 목소리와 요구를 반영해 인권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갈 의무가 국가에겐 있다. 악의적인 선동에 맞서 HIV 감염인의 인권을 보장하고 취약 집단에 대한 예방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국민 건강권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다.

한편으로 PrEP의 접근성이 높아지면 보다 활발한 성행위가 이루어지리라는 예상 때문에 고위험군 예방약 제공 계획이 진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렇기에 더욱 이 HIV 예방약이 해당 집단에 필요하다고, 접근성을 높일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러한 욕망은 우리 사회에 있었지만 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었을 뿐이다. 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담론을 정책과 제도에 담아낼 만큼 우리 사회는 성숙하지 못했다. 의학적으로 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에 대답하길 요구받는 사이에 성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무지는 취약 집단을 계속해서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십대 청소년의 에이즈 확진이 늘어난다면 그들에게 ‘동성애’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야 하나? 확진자 중에는 나는 ‘호모’가 아니니까 에이즈에 안전해, 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성애자의 경우 콘돔 없는 섹스에서 제일 먼저 염려할 것은 사실 임신일 테니 말이다. 또한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그들의 역할모델이나 지지자를 찾기 어려운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그들의 욕망에 대한 몰이해, 또래를 비롯한 공동체 사람들의 혐오 발언에 고립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들이 처할 수 있는 상황에는 어떤 것이 있고 그럴 땐 무슨 조치를 받을 수 있는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 성교육에 대한 욕구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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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에 대한 세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 근거로 사용되는 한 주장이 감염인 한 명이 기대수명까지 생존하며 사회생활을 하였을 때 벌어들일 수 있는 소득에 근거하여 책정된 것임을 우리는 이야기해야 한다. HIV 감염인 사망원인 2위가 자살일 만큼 내적 낙인이 심한 이 사회에서는 감염인 스스로 사회구조적 차별의 원인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스스로 삶을 끝내려는 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살 수도 있는 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비용’이다. 자살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와 연결된 가족, 친구, 직장동료 등 모든 사회적인 관계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다. 나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누군가가 삶을 포기했을 때, 그것을 비용으로 계산할 수 있는가? 가슴 아픈 인재로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누군가는 보상금을 운운하며 그들의 슬픔과 애도의 과정을 조롱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되고 싶은 인간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누군가의 자발적인 죽음을 목격당할 때 드는 생각은 이것이 어떻게 이 사람에게 강제되었을까, 이다. 그러지 않을 방법이 있었을지 사후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 자살의 구조적 그물에 걸려들 다음 희생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적절한 조치를 제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무지와 편견의 언어가 살 수도 있었던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을 택하게 한다면 그에게 정확한 정보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지와 돌봄을 보내는 것이 하나의 안전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가 실천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다. 누군가가 차별 발언을 하는 것을 목격하면 그것을 제지하고 그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에이즈가 죽음의 질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된다. 누구도 누군가의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이유로 그를 모욕하거나 차별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공격에 취약한 소수자 커뮤니티에서는 약한 고리인 HIV/AIDS와의 선긋기를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받고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주로 성관계를 통해 감염되는 질병의 특성은 게이라는 소수자성과 만났을 때 더욱 풀기 힘든 숙제를 남긴다. HIV 감염을 자신에게 일어난 피해로 바라보는 일은 ‘피해자’를 동시에 ‘잠재적 가해자’로 만들며 내적 낙인을 더욱 깊게 한다. 성적으로 매력적이길 요구받지만 그 실천에 있어 사람들에게서 배척당할 우려가 있는 감염인이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은 소수자 안의 소수자라는 이중 낙인을 낳고 관계 맺는 것을 소극적이게 한다. 일부 사람들은 감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고 그를 배척함으로써 안전해지고 싶어한다.

최근 게이 커뮤니티 내 경향 중 하나는 성관계를 맺기에 앞서 서로 오라퀵을 통해 감염 여부를 확인하고 노콘 섹스를 하는 것인데, 이는 감염되었더라도 음성 판정이 나올 수 있는 항체 미형성기, 창기간window period이 의심되는 성관계가 있은 뒤 최소 2주 이상, 확실하게는 12주까지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HIV 감염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는 행위이다. 특히 검사 결과에는 음성이 나오는 급성 HIV 감염 상태일 때는 체내 바이러스 농도가 높아져 타인에 대한 전파력이 훨씬 커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검사 결과만 믿고 노콘 섹스를 하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위험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비교적 안전하게 노콘 섹스를 하고 싶다면 감염내과에서 상담을 통해 프렙을 진행하거나 꾸준히 약을 복용하여 체내 바이러스가 억제된 상태로 타인에 대한 전파력이 0이 된 감염인과 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전파 위험에서 안전하다 하겠다. 이러한 상황을 모두 고려해보았을 때 누가 HIV 양성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노력은 부질없고 선정적이며 악의적인 호기심에 그친다고 할 수밖에 없다. (PrEP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예방약 복용은 간 수치 측정과 신장 기능 검사가 선행되어야 하고 급성 HIV 감염 상태는 아닌지 확인이 필요하다. 양성 상태에서 예방약을 복용할 경우 향후 치료제에 내성이 생길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즉 감염내과에서 의사의 상담을 통해 처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약물 부작용과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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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를 포함하는 보다 큰 개념인 MSM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성애자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MSM이라는 표현은 동성애자/이성애자라고 나눌 수 없는, HIV 감염에 취약한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성정체성이라는 렌즈로만 이 문제를 바라보았을 때 이 사실을 간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려는 MSM의 개념은 게이로 정체화하기 이전,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희박했지만 하지만 남자들과 성관계는 맺었던 시절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설명해보려 한다. HIV 감염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정서적 충격을 완화해줄 수 있는 지지자의 존재 여부인데, 정체화 이전이야말로 그러한 사회적인 지지대에서 완전히 고립될 수 있는 취약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정체화 이전의 성경험은 주변의 지지해주는 동일한 성정체성의 친구나 커뮤니티의 동료가 없는 채 일어난다. 커뮤니티라고 부를 만한 친구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어플을 통한 일대일 만남이나 익명성을 띤 크루징, 게이사우나 등의 업소에서 가지게 되는 성경험은 그가 커뮤니티에 합류하고 자신을 정체화해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만남 형태의 특징인 간편성과 효용은 커뮤니티에 대한 욕구를 완화시켜주기도 한다.

고립된 개별의 MSM 시절의 경험은 혐오세력이 주장하는 성적 수치심과 낙인이야말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언어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그것은 개인의 부정적 낙인을 심화해 올바른 정보를 받아들이는 대신 에이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키운다. 그것의 순기능은 섹스 과정에서 콘돔 등 예방 조치를 필수적으로 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소수자 스트레스와 결합해 자신을 비난하고 학대하는 형태의 성행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사회와 가정에서의 거부 등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나 혐오발언에 노출된 경우 문제적인 성행동을 하게 될 위험이 높다. 자신이 느끼는 자기 상과 동일한 수준으로 스스로를 깎아내리기 위하여 원하지 않는 성행위를 하거나 위험한 요소가 포함된 성행위를 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또한 게이들에게 있어 노콘에 대한 동의 여부, 콘돔에 대한 협상력은 상대의 외모나 사회적 조건에 따라 혹은 자신이 처한 우울이나 그날의 스트레스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미래가 없다는 느낌, 자신의 미래상을 그릴 수 없음 등의 부정적인 낙인 역시 스스로 건강한 삶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그런가 하면 성인 남성동성애자의 콘돔, 젤, 예방약 등에 대한 접근성과 청소년 동성애자의 접근성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청소년 동성애자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이 처한 위치와 한계를 동시에 고려하면서 볼 수밖에 없다. 자립하기 어렵고 법적으로 보호자가 필요한 시기의 일부 청소년에게 사랑이라는 감정, 혹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아름답고 긍정적인 이미지 대신 비밀과 자기혐오로 덧칠되기 쉽다. 자신이 게이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하고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단지 더러운 감정으로, 윤리적인 판단이 필요한 단죄해야 할 감정으로 바라보는 게이 청소년의 경험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자아상을 갖는 걸 방해하고 낮은 자존감과 죄의식, 수치심에 사로잡히게 한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에 시달리다 인터넷이나 어플 등을 통해 만남을 갖게 될 경우, 그 감정과 그 욕망을 해방하는 경험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예방, 치료 정책을 제안할 때 이러한 맥락을 세심하게 살필 수 있을까? 그러한 방법은 인간을 항문이나 바이러스, 비용이 아닌 인간으로 바라보는 당사자 집단과 손을 잡고 연결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한편 게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커밍아웃 과정은 개인의 차원에 머물던 인식을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하나의 렌즈가 되어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가족과 친구 등에게서 받지 못했던 정서적 지지를 커뮤니티를 통해 얻으며 관계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게 된다. 더불어 커밍아웃은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과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책임을 부여받는 경험이 되기도 하는데 이후 게이들은 HIV/AIDS 이슈에서 다시 한번 갈림길을 맞이한다. 확진 전과 확진 후, 당사자의 문제인 경우와 타인의 문제인 경우.

굳이 혐오세력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주류질서에서 벗어난 비규범적 성행위에 대한 수치심과 비난의 목소리는 한국사회에서 늘 설득력을 가진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점은, 우리는 에이즈 지식 정답률이 15%에 그치는 절망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성에 대한 수치심과 낙인은 문제를 투명하게 바라보기 어렵게 하고 성적 활발함을 비난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합의된 성인 간의 성관계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 관계 맺는 방식이 폭력적이지는 않았는지, 서로 의사를 존중했는지 살피는 일이지 그 다양한 실천의 형태를 비난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한 비난은 모두를 설득할 수는 없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의 영역일 뿐이다. 정책을 세움에 있어 필요한 것은 이러한 성적 실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위해를 감소시킬 접근법을 세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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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살롱을 촉발시킨 16:1 부카케 영상은 이 논의의 한복판에 자리한다. 말 그대로 열여섯 명의 남성이 다른 한 명의 남성의 얼굴과 입에 사정하고 정액을 먹는 영상이 트위터의 한 섹스 계정에 올라왔고 그중 한 명이 감염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일부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성적 문란함에 대한 비판과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걷잡을 수 없는 형태로 번져나갔다. ‘번개했던 사람 얼굴에 붉은 반점이 있는데 에이즈일까요?’ 수준의 질문을 하던 게이들에게 PrEP과 Pep, U=U 캠페인까지 수준 높은 정보가 한 차례 업데이트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것은 노콘 섹스에 대한 욕망과 행위는 늘 있어왔지만 그것을 죄악시하고 터부시하는 사회 및 내부 커뮤니티 분위기 속에서 정작 게이들이 알고 싶어하던 정보는 공개적으로 공유된 적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마침 그 무렵 SBS에서 방영된 지하철 토끼남의 사연에서 감염내과 의사가 Undetectable=Untransmittable, 바이러스 미검출 상태는 감염 불가라는 최신 의학적 사실을 충실히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질병이 가져온 육체적, 사회적 고통에 대한 AIDS에 대한 온정주의적인 시선은 딱 거기까지에 머문다. 성노동자, 남성 동성애자 등 비규범적 성행위를 통해 감염된 경우 사회의 시선은 병을 인과관계로, 그릇된 행동에 대한 형벌로 인식하는 비과학적인 입장을 취한다. 외부의 시선을 내면화한 게이 커뮤니티의 온도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걸레’가 우리를 욕먹게 한다, 는 식의 입장은 이러한 사안에서 꼭 등장한다. 하지만 이성애자 한 명이 모든 이성애자를 대표할 수 없고, 동성애자 한 명이 해당 집단을 대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선정적이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안에 있어서는 이러한 논리가 얼어붙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의 특성을 해당 집단의 대표성으로 간주해버리고 그로써 그동안 있어왔던 편견과 차별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삼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앞서 설명했듯 HIV 감염인이라고 하여도 자기 상태를 정확히 알고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다면 타인에 대한 전파력은 0이 되기 때문에 HIV 감염을 우려했다면 그에 대해선 안심해도 된다. 오히려 자신이 감염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따져 물어야 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오라퀵을 해서 음성이 나왔다고 해도 그것을 맹신할 수 없다. 석 달 이상 성 접촉이 없었던 경우라면 모를까. 하지만 한국에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에이즈예방법에 있는 전파매개금지조항이다. 이것은 감염인이 체액이나 혈액을 통하여 전파매개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여기까지 들으면 에이즈 확산 방지를 위해 꼭 필요한 조항처럼 보인다. 마치 군형법 제92조의 6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전파매개금지조항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는데 하나는 감염 사실을 알고 있고 적절한 치료를 받아 전파력이 0이 된 감염인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상태를 고지하고 합의하에 콘돔 없는 성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상대방이 감염되지 않았더라도 ‘전파매개행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며, 만약 내가 검사를 받지 않아 감염 여부를 몰랐다면 ‘전파매개행위’를 했더라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조항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과연 자발적으로 HIV 검사를 받으려 할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신규 감염인 증가를 지적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 부분은 서울시를 비롯한 전국 보건소에 무료 익명 신속검사가 보급되어 검사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고 젊은 층에게 HIV/AIDS에 대한 인식이 퍼진 결과라고 긍정적인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규 감염인을 증가시키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무도 검사받지 않으면 감염인 증가는 0이 된다. 하지만 조기발견 조기치료를 목표로 삼는 에이즈의 경우는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그에 따른 조치를 받는 것이 에이즈 종식으로 가는 길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감염인이 고의를 품고 악의적으로 사람들에게 바이러스를 확산시키는 경우에 그것을 어떻게 처벌할 것이냐일 텐데 만약 타인에게 HIV를 고의로 감염시킨 것이 분명하다면 이것은 형법에 있는 중상해죄로 처벌할 수 있다. 상대방이 감염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중상해죄 미수에 해당하고 중상해죄 미수의 경우는 무죄이기 때문에 처벌받지 않는다. 또한 전파매개금지행위라는 것 역시 그 정의가 모호한데 한국에서는 콘돔을 사용했는지 여부로만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 에이즈예방법이 치료제가 없던 국내에 감염인이 단 4명 존재하던 1987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당시의 의과학적인 지식에 비추어보더라도 합리성이 결여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에이즈예방법은 에이즈 유행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한 실효성 없는 인권침해적인 조치들(에이즈 환자 격리, 감염인 추적관리, 감염취약계층 강제검진 등)의 법적 근거로서 마련되었다.

30여 년이 흘러 발전한 의학은 감염인의 체내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데 성공했고 비감염인이 복용할 수 있는 예방약까지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 조항은 예방약을 복용한 비감염인과 체내 바이러스가 억제된 감염인이 노콘 섹스를 했을 때에도 처벌 가능한 것이다. 이는 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본래의 입법 목적이었을 예방과 전파 확산 방지에도 전혀 기여하지 못하면서 단지 감염인이 전파의 온상인 양 범죄화하고 낙인찍는 데에 소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 전파매개금지조항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감염인을 위축시키고 그의 내밀한 사적 영역을 끊임없이 간섭하며 통제한다. 강간이 아닌 이상 성관계는 서로의 합의를 거쳐 성립하는 것임에도 이 조항은 전파가능성의 책임을 쌍방이 아닌 감염인에게만 전가한다. 서로가 피가해 구도를 형성하는 이 과정에서 감염 예방을 위한 국가의 의무는 은근슬쩍 사라지고 만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사회에 팽배한 에이즈에 대한 낙인이 어디에서부터 기원했는지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감염인을 대하는 사회의 수준이 30여 년 전에서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후진성의 증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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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6:1로 돌아가서, 우리는 이 행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라는 가정하에, 그들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어떤 위험성을 가져올 수 있는지 인지했다고 보아야 한다. 콘돔 없이 체액을 나누는 행위는 성병 감염 가능성을 동반한다는 것 역시 다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해당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 중 누군가가 감염인이라는 추측이 도는 순간 합의하에 모인 그날의 사건에 대한 ‘피해’(과연 무엇이 피해인가?)는 감염인 한 명에게 과도하게 책임을 지운다. 이게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최소한 이것이 아주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HIV 감염 여부에 대하여 사전에 구두로 확인받았든, 보건소에서 떼어간 증명서를 보여주었든, 오라퀵을 하여 확인했든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양성임에도 음성 판정이 나오는 시기는 존재한다. 결국 그가 누구든 주기적으로 성생활을 하고 있다면 누구나 양성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 말은 곧 우리 모두가 예비감염인이다 라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인권단체에서 말하는 ‘우리 모두는 예비 HIV/AIDS감염인입니다’라는 말은 이러한 공중보건상의 위험을 함축하고 있으며 그것은 경각심을 가져 각자 HIV 검사를 받자는 의도이기도 하지만, 소수자 커뮤니티 안팎으로 무지와 편견에 고통받는 감염인들의 목소리가 되어주자는 뜻이 더 크다. 우리 사회에서 HIV/AIDS 당사자의 목소리는 너무도 작고 잘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되 혐오세력이 잘못된 정보와 과거의 의학 지식으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려 할 때 우리는 그 앞을 막아서고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책임이 있다. 가벼운 감기에만 걸려도 힘이 드는데 어찌하여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이리도 무감각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훗날 기억하는 것은 감염인이 누구였는지가 아니라, 누가 이 소문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누군가를 바깥으로 밀어냈는지, 누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지를 기억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살고 싶은 사회의 모습은 그러하다.우리나라는 사람이 죽었어도 전철이 지연 출발하는 것만을 염려하는 사회여야 할까? 신길역 리프트추락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를 애도하며 전철 지연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례한 이들이 큰 목소리로 “그러게 누가 장애인 되래!?”하고 외친다고 한들 침묵하고 있는 다수가 그와 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다고 믿고 싶진 않다. 그들은 죽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온몸으로 문제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하는 목소리가 없다면 죽음은 반복될 것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해마다 구제역과 AI가 돌아 무수한 생명이 산 채로 땅에 묻혀도 내 일은 아닌 것처럼. 어떤 죽음은 무시해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얼굴을 봐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외면할 수 있을까? 고통에는 얼굴이 있다. 사람은 바이러스나 항문만으로 표현되기엔 너무도 복잡한 관계와 의미 속에 얽혀 있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바이러스가 되고 항문이 된다. “타자에게 가해진 모욕에서 상처를 입는 것은 나 자신의 인간성이다.”(파스칼 브뤼크네르) 그들에게는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글 : 유성원

기사 출처 :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b8ccd0be4b0511db3da2c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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