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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주의자가 회식적 회의주의에 빠진 이유

친구는 회식 1차를 마치고 택시로 집에 가는 길이었다. 상사에게 전화가 왔다. “지명아(가명) 기사님 좀 바꿔줄래?” 다정한 목소리였다. 친구는 영문도 모르고 기사님께 전화기를 건넸다. 이사님과 통화한 기사님은 차를 돌려서 서울 삼성동 회사 앞에 다시 가 내려 줬다. 친구는 그렇게 택시를 타고 먼 길을 돌아 2차에 참석했다. 실제 있었던 삼성동 직장인의 회식 사례다. 직장인의 슬픔인 회식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볼 순 없을까?

고백건대 나는 ‘회식주의자’다. 조직이 함께하려면 가끔 회식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관습적이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회식 참석보다는 회식을 꾸리는 과정을 좋아한다. 지난 모든 직장에서 ‘오락부장’을 자처해왔고, 회식이 있을 때마다 구성원 모두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식당을 고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후배들이 “선배 이번 간 식당 괜찮았어요”라고 얘기해 주면 그렇게 기분이 우쭐할 수가 없다. 원래는 ‘회식주의자의 회식 이론’이란 글을 준비했다. 4개의 직장에서 다양한 기업 문화를 접해 본 나의 미천한 경험에 추가 취재를 통한 다수의 의견을 더하고 이를 종합해 ‘좋은 회식’의 조건을 나열해보는 기획이었다.

‘좋은 회식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물어보기 위해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더니, 메신저 창에 불이 났다. “잔 돌리기 금지”, “119(1주일 전 공지·1차에서 마무리·9시 전에 종료)는 꼭 지켰으면”, “평소 못한 말 허심탄회하게 하자고 해놓고 부장님만 허심탄회한 거 금지”, “노래방은 막내가 정말 가고 싶어 할 때만 갑시다”, “부장님네 집 근처 맛집은 가족이랑 가세요” 등의 분노가 빛의 속도로 날아들었다. “그나마 좋은 회식을 만들기 위한 세세하고 심지어 지엽적인 조건을 말해달라는 것”이라고 좀 더 자세히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좋은 회식이란 없다”며 “아무리 좋은 한우를 먹어도 회식 자리에서 먹으면 그냥 맛없는 단백질”이라고 화를 냈다.

“가장 짧은 회식이 가장 좋은 회식”이라는 회의적인 의견들이 다수를 이뤘지만, 성과는 있었다. 대체로 “식당 화장실에 신경 좀 써 달라”는 여성들의 의견이 많았다. 허름한 술집이나 상가 1층의 고깃집에는 아직도 화장실에 남녀 구분이 없거나 실외에 있는 경우가 많다. 한 후배는 “실외 공용 화장실은 정말 ‘극혐’(극히 혐오)”이라며 “겨울에 덜덜 떨며 기다리는데 내 뒤에 남자 직원이 줄 서면 최악이다”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채식주의자가 많아지는 추세라 고깃집보다는 생선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며 “삼겹살이 싼 거 같지만, 막상 계산서 보면 횟집이랑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말해준 부장님도 있었다. 회식 담당자들이 꼭 체크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직급에 따라 의견이 갈렸다. 과장 이상 직급은 “상사들만 둘러싸인 테이블에 앉는 게 싫다”고 불만을 늘어놨다. 그래도 과장인데, 이사님 테이블에서 막내사원처럼 끌려가 고기나 구우며 잔소리만 듣는 회식은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싫다고 했다. 이런 친구들이 회식에 가면 후배들에게 “얘들아 좀 섞어 앉자”고 말한다. 그러나 후배들은 또 이 “섞어 앉자”는 말을 죽도록 싫어한다. 직급 따라 입장 따라 회식은 다르게 읽힌다. 모두에게 ‘좋은 회식’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좋은 회식을 찾아보려는 내가 너무 오만했다.

세상에 내리는 눈송이의 형태가 다 다르듯, 저마다 회식은 저마다 방식으로 누군가에겐 꼭 고통스럽다. 고급 식자재 유통업체에 다니는 한 후배는 “식자재를 다루는 기업이라, 인테리어나 집기가 트렌디하면서도 음식이 맛있고 위생적인 ‘핫한’ 곳을 찾아내지 못하면 취향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듣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패션 잡지에서 일하는 후배들도 이놈의 ‘트렌드’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회사가 강남 삼성역 근처인데, 패션 잡지답게 핫한 가게에서 먹어야 한다고 홍대나 이태원에 가는 경우가 있다”며 “회식은 무조건 회사에서 가까운 곳이 최고”라고 밝혔다. 1000개의 회식이 있으면 3000개의 불만이 나온다. 문제는 모두가 함께해야 ‘회식’이라는 점이다. 회식주의자가 회식 회의주의에 빠지는 이유다.

공상과학 영화 속에 나오는 외계인 중에 문화 인류학자가 있고, 이 인류학자가 현대 한국에 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행동 양태를 관찰했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극동아시아 한반도에 사는 호모 사피엔스는 같은 노동 집단에서 일하는 사람끼리 여가를 할애해 음식을 먹고 알코올을 다량으로 섭취하는 특이한 문화가 있다. 보통 무리의 우두머리 격인 사람이 일어나 투쟁심을 불태우고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이런 모임을 ‘회식’이라 부르는데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그 빈도가 늘어나고, 때로 단체로 블랙아웃 현상이 일어날 때까지 알코올을 섭취하는 자기 파괴적인 양상을 보인다.” 회식주의자가 취재를 하고 회의에 빠졌다. 대체 회식은 왜 하는 걸까?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기사 출처 :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dringking_kr_5c1c3825e4b05c88b6f69f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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