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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였던 할아버지 환자가 남긴 마지막 선물

몇 년 전 어느 날, 70대 초반의 남성이 진료를 받으러 왔다. 깔끔한 캐주얼 차림에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 쓴 노년의 남성이었다.

“미안합니다. 모자를 벗는 게 예의인 줄 아는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의 직업은 의사였고 나와 같은 개원의였다. 그 나이의 의사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 역시 오랫동안 동네 의원을 운영했던 듯하다. 그저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는 반복적인 일상을 어느새 40년 넘게 해 왔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그저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는 똑같은 일상’이라고 했지만, 그의 수십 년이 얼마나 치열했고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성실했을지 이제 겨우 40줄에 접어든 나는 짐작조차되지 않는다.

잠깐의 머뭇거림이 있은 뒤 조심스럽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그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기침이 심하고 오래가서 두달 전쯤에 검사를 했는데 폐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수술이 의미 없는 말기 상태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어쩌면 할 수 있는 게 그게 전부인 항암 치료를 받고 있노라고 했다. 더불어 듬성듬성 흉하게 빠진 머리카락 때문에 모자를 벗지 못한다며 이에 대해 거듭 양해를 구했다. 그 역시 그저 환자로서 나를 만나려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게 어떤 여성의 이름이 적혀 있는 처방전 한 장을 건넸다. 그의 아내가 지금 복용중인 혈압약의 처방전 복사본이라고 했다.

“혹시 아내가 지금 먹고 있는 혈압약이 다 떨어지면 이곳에서 진료를 받게 해도 괜찮을까요?”

나는 그렇게 하시라고 답했다. 솔직히 조금 복잡하고 어려운 케이스였다고 해도 나는 그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로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 처음 본 60대 여성이 진료실로 들어오며 90도로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너무 정중한 인사에 깜짝 놀란 나는 영문도 모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같이 인사를 했다.

“그이가 보름 전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 저에게 약도를 그려주면서 이리로 가라고 하셨어요.”

그녀는 내게 택시 정류장과 1층 약국 그리고 시장 입구가 그려져 있는 약도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가세요.’라는 글자가 꾹꾹 눌러 써져 있는 종이 한 장을 보여줬다. 나는 그제야 부랴부랴 책상 서랍을 뒤져 까마득한 선배 의사에게서 받았던 처방전 복사본과 함께 잠시 잊고 지내던 기억을 소환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와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 지금은 처음 진료를 받으러 왔을 때보다 약도 많이 줄인 상태다. 그사이 혈압과 무관한 다른 병들로 큰 병원에서 이런저런 치료와 수술을 받기도 했지만, 무사히 고비를 잘 넘기면서 비교적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아마도 작년 가을이었던 것 같다. 여느 때처럼 혈압약 처방을 받으러 온 그녀가 진료를 마치고 나가면서 말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원장님이 계셔서 참 든든해요. 어쩜 그이가 제게 주고 간 마지막 선물인 거 같아요, 선생님이.”

본인 스스로 충분히 예상했을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의 삶을 독한 항암제로 버티면서도 혼자 남겨질 아내의 혈압약 처방을 부탁할, 자신을 대신해 아내의 주치의가 되어줄 의사를 여기저기 찾아다녔을 그가 생각났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그녀가 오늘도 왔다. 굳이 집에서 한 시간도 더 걸리는 이 먼 곳까지 와서 웃는 얼굴로 혈압을 재고 처방전을 받고 여전히 90도로 인사를 하고 간다. 다른 어떤 말을 더하지 않아도 그저 그 미소만으로 내 가슴은 이미 먹먹하고 충분히 따뜻하다. 어쩌면 진짜 선물을 받은 건 나인지도 모른다.

* 에세이 ‘괜찮아, 안 죽어’(21세기북스)에 수록된 글입니다.

기사 출처 :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cc0037ce4b0ad77ff7d0c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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