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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결혼하기 위해 이혼했다

폴과 나는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 16년 동안 친구로 지냈다. 사랑을 느끼자 서로 이혼하고 결혼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잠깐,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설명해 보겠다.

일단 우리는 전통적인 의미의 ‘친구’는 아니었다. 사실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도 못했다. 우리는 매년 여름마다 사흘 동안 열리는 페스티벌인 오리건 컨트리 페어의 버거 부스에서 일했는데, 우리의 우정은 오직 그곳에서만 존재했다.

매년 7월이면 오리건 컨트리 페어(50년 동안 개최하고 있는 2만 명 이상의 ‘가족’들에겐 그냥 ‘페어’였다)는 오크나무가 있는 수천 에이커의 풀밭을 사흘 동안 오리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만들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페어는 예술과 음악이 있는 페스티벌로, 작가 켄 키지[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저자]와 초기 그레이트풀 데드[주: 미국 밴드]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겉으로 보기엔 히피들로 가득한 야광 사이키델릭 놀이터이니 버닝 맨 페스티벌의 선조라 할 수 있다. 더 깊은 의미를 보면 페어는 삶에서 새로운 것을 찾으러, 더 고귀한 의미를 찾으러, 혹은 일상의 안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것을 찾으러 가는 곳이다. 그저 즐겁게 노는 것일 뿐이라 해도 말이다.

폴과 나는 열심히 놀기보다는 행사가 굴러가도록 하는 일벌 역할을 하는 편이었다. 우리는 둘 다 페어를 여는 언더그라운드 가게들과 사교계의 방대하고 복잡한 지역 네트워크를 통해 십대 때부터 페어에 참가했다. 우리는 원래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만났다. 페스티벌에서는 드문 존재다. 나는 매일 아침 식사 때 일하며 매점에서 감자를 썰었고, 폴은 근처 냉장고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고 다른 사람들과 잡담을 했다. 나중에 폴은 그릴에서 일하며 배고픈 히피들, 히피들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위해 뜨거운 여름에 버거를 구웠다. 좁은 곳에서 일하다보니 서로 친근하긴 했지만, 요란한 환경과 쉴새없는 직원 교체 때문에 3년 정도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은 기억하게 되었다.

마침내 사랑에 빠진 것은 그 감자 도마 앞에서였다. 한번의 눈맞춤, 너무나 길고 강렬해서 주방을 지나가던 십대 소년이 멈춰섰을 정도의 시선 교환이었다. 지금까지도 왜 그런 눈빛이 나왔는지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폴이 비틀거리며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했던 건 기억난다. 그리고 나는 내 목에 손을 댔는데, 너무나 달아올라 있어 만지자 타오르는 듯했다. 우리 둘 중 누군가가 태연한 척하는 겉모습 속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말을 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한 가지 생각이 머리로 치밀고 들어왔다. 폴일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과 잘해보려고 애쓰는 삶을 살아왔지만, 내가 함께 했어야 하는 사람은 몇 년 동안 내 바로 앞에 있었던 사람인지도 몰라. 폴이었을지도 몰라.

우리는 평소처럼 감자를 썰고 버거를 구웠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아주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당시 우리는 둘 다 각자 파트너가 있었고, 30대 중반이었고, 제대로 된 직업이 있었고 가정에 헌신하고 있었다. 우리 둘 다 행복하지 않았다. 최악은 그에겐 아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주에 폴의 아내와 아이들이 처가로 긴 휴가를 떠났다. 폴은 집 근처 시골의 블루베리 밭에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초대했다. 우리가 페어 외의 곳에서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며칠에 걸쳐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둘 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는 야심찬 사람들이었다. 나는 첫 책을 낼 참이었고, 그는 새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응원해주지 않는 파트너, 해가 되는 친구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압도적 의무감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함께 해야 한다는 걸 뼛속 깊이 알고 있었고 떨어져 있기가 고통스러웠다. 페어에서 여러 해 동안 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아직도 너무나 적었다. 우리가 진짜로 오래 가는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건 미친 생각 같았지만, 그의 모든 것이 나와 잘 맞았다. 마치 그동안 내내 같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주에 우리는 처음으로 밤을 함께 보냈다. 옆으로 누워 이마를 맞댄 채 잠이 들었고, 그대로 꼼짝않고 8시간 동안 잔 다음 일어났다. 푸른 달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걸 말없이 몇 시간이나 바라보았다. 이건 우리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만적인 삶을 살 수는 없고, 진실이 언제나 픽션보다 낫고, 불행한 부모는 불행한 아이들을 만든다는 걸 아는 우리는 빨리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그뒤로 4주 동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하려 애썼다. 내 마음과 양심은 내게 비명을 질러댔다. 내 친구들이(그리고 대부분의 영화들이) 유부남들은, 특히 폴처럼 아이들을 아끼는 아버지는 절대 아내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리는 것 같았다. 결국 친구 몇 명에겐 이야기했지만, 반응은 똑같았다. 내가 원하면 지금 관계를 깰 수는 있지만, 폴이 함께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며칠 뒤 나는 문자 그대로 걸어나왔다. 화를 잘내는 내 파트너가 친구들과 함께 외출한 동안, 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짐을 쌌다. 그와 나는 그렇게 스쳐지나가듯 헤어졌다. 집에서 나온 뒤 30분 뒤, 이젠 전 남친이 된 그가 내 예상대로 감정없는 문자를 보냈다. “그럼 이제 끝인가 보네.” 그뒤로는 내게 절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나를 잡으려는 시도조차 거부하다시피 했다는 건 그와 헤어지는 게 옳은 일이었다는 사실을 꺠닫기에 충분한 증거였다.

친구들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가운데 나는 친구 집의 손님용 방에 틀어박혀 폴을 기다리며 용감해지려 애썼다.

며칠 뒤 폴은 그 작은 방에 나와 함께 앉아 있었다. 폴은 아내가 휴가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리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폴이 죄책감이 너무나 커져 마음을 바꾸길 바라며 아이들에게 하루 안에 말하라고 시켰다. 폴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도 아내가 끝났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자 폴은 강경하게 나왔다. 아내에게 직접적으로 이건 바람이나 불장난이 아니고 여생을 나와 함께 할 생각이라고 말한 것이다. 15시간 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작업 트럭에 싣고, 아이들에게 키스하고 다시 보러오겠다고 약속한 다음, 자신이 그 순간까지 알고 있었던 자신의 삶에서 차를 몰고 떠났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다들 자기가 더 잘 안다는 듯이, 우리가 예전 관계에서 행복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건 이해하지만, 우리 사이는 잘될 수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우리가 예전 파트너와 잘해보려고 악전고투하며 비참하게 사는 것을 직접 보았지만, 이걸 허락할 수는 없다고 했다. 예전에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들도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그 시점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가능이라도 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난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폴이 아내와 벌이는 지옥같은 법정 싸움, 함께 시작할 새 삶 계획, 그의 아이들에게 꼭 주고 싶었던 시간과 관심의 부족에 대처해야 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했다. 물론 문제도 생겼다. 친구 집에서는 몇 주밖에 머무르지 못했고, 폴이 가진 집에서 세입자가 갑자기 나가서 거기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고 둘 다 예전 파트너들과 문제가 남아있어서 우리의 물건 상당수를 두고와야 했다. 친구도 몇 명 잃었다. 냄비, 팬, 식탁이 없었고, 예전 세입자는 침실 벽에 큰 구멍을 몇 개 내 놓고 떠났다. 출퇴근 경로, 사는 동네, 거래 은행, 슈퍼마켓이 다 달라졌고 돈은 거의 없었다.

동거를 시작한 뒤 첫 몇 주 동안은 너무나 정신이 없어서, 나는 어느 날 집에 오다가 방향 감각을 잃고 집을 못 찾아 한참 헤맸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야 할 작은 일들이 많았다. 저녁은 언제 먹는지(일찍), 어떤 영화를 같이 보는 걸 좋아하는지(우리는 책을 선호했다), 일요일 아침에는 뭘 할지(산책). 침대 어느 쪽에서 자는 게 좋을지를 파악하기 위해 몇 달 동안이나 계속 자리를 바꿔가며 잤다. 내 짝을 만났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런 일들이 얼마나 중요하지 않은지를 깨닫고 우리는 놀랐다.

우리가 정말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오리건 컨트리 페어에서 길고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은지 1년 뒤, 우리는 결혼했다. 페어에서 1년 더 일하고 완전히 그만두었다. 우리 두 사람이 오랜 세월 동안 찾아왔던 것을 발견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올해 우리는 결혼 4주년을 맞는다. 전생의 일 같기도 하고 바로 어제 일 같기도 하다. 올해는 법정 싸움에서 벗어나고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진 첫 해다. 이 문제들 때문에 초기에는 분위기가 나빠지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집 수리도 잘 했지만 비가 쏟아질 때를 대비해 페인트칠은 한번 더 해야 한다. 작년에는 정원을 잘 가꿔, 겨우내 직접 키운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 있었다.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동네에서 장볼 곳도 잘 안다. 난 집에 오다가 길을 잃지 않는다. 우리 둘 다 아주 사교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곁을 지켜준 친구들과 그동안 새로 사귄 친구들이 조금 있다. 잃어버린 친구들이 많지는 않고 그들이 그립지도 않다. 내 부모님과 친척들은 폴과 아이들을 환영해주었고, 폴의 가족들은 지금도 내가 헤픈 백치 같은 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다 승리하지는 않았다.
우리 결혼 생활은 행복하다. 결혼 직후 둘 다 커리어를 바꾸었고, 프리랜서가 되자 함께 하는 새 삶을 만들어가기가 쉬워졌다. 첫 2년 동안은 자동차 여행, 캠핑, 내 첫 책 홍보 투어 등 여행을 많이 다녀서,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의 과거를 익히는데 도움이 되었다.

TV 등 스크린이 거의 없는 우리 집에 와서 잔뜩 배를 채우면서도 ‘늙은 히피 음식’이라고 비난하던 아이들은 아직도 컬쳐 쇼크를 조금 겪고 있다. 아이들과 가까워지기는 조금 더 어려웠지만, 우리는 가족이 되었다. 주말 오전에는 공원으로 산책을 가고, 저녁에는 책을 낭독한다(지금은 로라 잉걸스 와일더를 읽는 중이다). 아이들은 우리 동네에서 친구도 사귀었다. 대부분 부모가 재혼하여 두 집을 오가는 아이들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균형감을 주었다. 일단 모든 것을 잃어야 할지라도, 행복은 모든 것을 바꾼다는 걸 우린 배웠다. 그리고 사랑, 특히 나이가 꽤 든 다음 찾은 사랑은 적응하고 목적이 있는 삶을 만들어 갈 공간을 만들어준다. 인생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나 욕정 때문에 생겨난 관계에는 없기 쉬운 우정과 평등함이 있다. 사람들은 부부 관계에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어렵지 않게 행복을 가질 수 있다. 스릴이나 부침으로 이루어진 행복이 아니다. 서로 상대와 편하게 지내는 관계에서 오는 충족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가능하며 확장이 가능하다. 아이들을 감싸주기에 충분하다. 아이들 역시 부모가 함께 지낼 때 행복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었고, 아버지가 나와 느끼는 행복을 보며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날 감자 도마 앞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나는 지금도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나이 많은 부부들? 그들이 옳다. 자기 짝을 만나면 바로 느낌이 온다. 몇 년이 지난 지금 폴과 나는 서로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고, 우리 각자가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부부인지에 대한 믿음이 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했다. 난 언제나 용감해질 수 있고, 폴은 늘 내 곁에 있어줄 거란 걸 안다.

*허프포스트의 글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기사 출처 :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d00e8b8e4b0e7e781705b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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