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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연애는 함께 청약은 따로

연애를 시작했다. 연애 안 해도 결혼 안 해도 혼자 재미있게 잘 살고 있다고, 혼자 사는 생활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던 게 바로 지난달이었다. 그러고 몇 주도 되지 않아 남자친구가 생겼다. 입이 방정이라는 말이 알고 보니 글에도 통하는 것이었던가. 한 치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삶, 인정합니다.

오랜만에 시작하는 연애에 한동안 우왕좌왕했다. 일단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새삼 신기해서였다. 남자친구와는 작년부터 알고 지냈지만, 소설 쓰기 모임에서 자주 봐도 친해지기까지는 오래 걸렸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인상은 차고 날카로웠다. 소개말조차 안 깐 알밤처럼 까칠했다. 그래도 온도는 낮지만 밀도가 높아서,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사람에게서 어느 순간 보늬처럼 부드러운 말들이 열려나오기 시작한 게 바로 최근이었다.

“넌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잖아”

그러나 서로의 반경이 좁혀지던 때조차, 마음 한편에선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사람 같은 기분이 있었다. 며칠 뒤 그 불에 타고 있는 게 다름 아닌 내 집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도 그랬다. 이런 오류는 내가 삼십대의 연애에 품어온 막연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는 정말로 삼십대에 시작하는 연애는 간장 없이 음미하는 곤드레밥이나 손두부같이 덤덤한 맛일 줄 알았다. 그런데 연애를 시작했더니 막 뚜껑을 연 사이다처럼 달고 청량한 감정이 매일 따갑게 튀었다. 그때마다 나는 고장 난 로봇처럼 압도되다, 결국은 인정하고 말았다.

다를 게 있나. 삼십대에도 밤이 늦도록 충전기를 꽂아놓고 통화를 한다.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서로 묻고, 둘 다 초록색을 좋아하면 기뻐한다. 짧은 데이트를 할 때 저녁놀이 아름답고 시원한 바람이 불면, 그게 이 세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호의처럼 여겨져서 감격하기도 한다.

굳이 이 연애가 다른 점을 찾자면, 이 마음이 어디로 갈지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무살에 만났던 남자친구가 술을 마시고는 “넌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잖아” 하며 내 앞에서 엉엉 운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싱거운 촌극일 뿐이다. 나나 그 친구나 솜털이 남은 병아리 같은 존재들이었는데, 그게 웬 소란이었는지(대성통곡했던 그 친구도 그러고서 10년은 더 있다가 결혼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친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괜찮은 연애의 다음은 결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삼포세대라는 말이 생겨나기 전이었다.

반대로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 연애는 괜찮지 못한 연애였다. 그러니 결혼을 언급하지 않는 연인에게서는 빨리 도망치라고, 또 결혼할 자신이 없으면 나 또한 상대의 삶에서 얼른 비켜주라고 우린 배웠다. 애초에 나와 결혼하기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피하라는 것도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가르침 중 하나였다. 그리고 엔(n)포세대가 우리 얘기가 된 뒤에도, 우리는 그 강박스러운 불문율 안에서 이십대를 마저 보냈다. 이런 일들은 그 뒤로도 내게서 또는 친구들에게서 여러번 반복이 되었다. 내가 울었다가, 네가 울었다가 하면서 우리는 점점 담담한 삼십대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결혼부터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이 이렇게 든 건 처음이다. ‘쿨함’을 가장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만나 봐’ 같은 남들의 부추김도 아니다. 예전엔 연애를 시작하면 마음이 시끄러웠다. 행복할지 불행할지 모를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신호가 약한 채널을 틀어놓은 텔레비전을 항상 켜놓았던 것이다. 그런 고질적인 조바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건, 이제는 내가 내 삶을 어디로도 내몰지 않고, 어디에도 가두지 않기로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냥 지금 내 삶이 좋아서, 지금의 연애도 좋다. 모임 일원으로서 그를 좋아했던 것처럼, 이제는 여자친구로서 한 겹 더 깊이 좋아한다. 이렇게 되어온 이 인연 자체도 좋다. 그럼 이 좋아함의 앞에 무엇이 있을까. 글쎄, 뭐든지.

연애를 한다고 삶이 바뀔 필요는

며칠 전에 회사와 가까운 지역에 행복주택 예비입주자 모집 공고가 떴다. 지금 사는 집도 대체론 만족하고 있지만 그래도 볕이 드는 베란다를 얻고 싶은 소망이 있어서다. 한동안 버팀목 전세자금대출 같은 것도 알아보았지만 잘 안됐다. 전세 매물 자체가 드문데다, 임대인에게 대출 협조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역시 ‘이번 생에 베란다를 누리려면 행복주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올해 들어서는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서울주택도시공사의 임대주택 모집 공고를 부지런히 들여다보고 있다.

행복주택 청약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청년 계층이나 사회초년생에게 배당되는 호수는 대개 몇십호 내외로 적다. 신혼부부나 예비신혼부부에게 공급되는 물량은 훨씬 많은 편이라 상대적으로 당첨 가능성도 높다. 행복주택이 당첨되는 바람에 입주 시기에 맞춰 결혼을 앞당긴 지인들도 있을 정도다.

남자친구도 독립을 준비하고 있어서 공고가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는 청년 자격으로 청약을 넣겠다는 얘기를 남자친구에게 하는 것을 순간 망설이고 있었다. 만난 지 몇주 되지도 않았으니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내가 예비신혼부부라는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자신이 없었다. 부부 같은 말에 대한 나의 거리감을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걸까. 그 말이 벌써 가깝다면 부담스럽지 않을까, 반대로 그 말이 아직 멀다면 서운하지 않을까. 하지만 다음주 월요일, 나는 청년 계층 자격으로 청약을 신청할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포기하리라 생각했던 연애가 갑자기 시작되었다. 연애를 한다고 해서, 또 그 시작이 삼십대의 중간이라고 해서 꼭 내 삶의 테두리도 바뀔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 사귐을 통해 배우고 있다. ‘이대로 괜찮다’라고 할 때 그게 인생의 가장 좋은 순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내 삶의 테두리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눈여겨보고 정을 들일 뿐이다. 앞으로도 삶에서는 이런저런 것들이,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머무르기도 하고 떠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테두리는 그 안에서의 삶의 모양을 따라 바뀔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은 내 삶 위에 놓아두었다.

추신. 이 글을 쓰다가 남자친구에게 행복주택 이야기를 했다. 독립을 생각하고 있던 남자친구도 이번에 같은 곳에 청약을 넣기로 했다. ‘예비신혼부부’가 아닌 ‘청년형’으로 각각. 다섯평이라도 서울에 있는 아파트라, 당첨된다면 그걸로 올해 우리 운이 다 쓰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그와 이웃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일단은 그것부터 아주 멋질 것 같다.

글 · 유주얼

* 한겨레에 실린 글입니다.

기사 출처 :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5d0f3d16e4b07ae90d9e6ca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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